시장에 믿음 주는 ‘경제 리더’ 해외투자자 마음 잡았다

 <2> ‘11억 인도인의 희망’ 만모한 싱 총리

非힌두교 출신 약점 딛고 역대최고 총리에

3년연속 8%이상 성장… 분배·성장 둘다 잡아

“권력은 잔파트 10번지(소냐 간디 집권연정 의장 자택)에 있지만 국민의 사랑은 레이스 코스 7번지(만모한 싱 총리의 관저)에 있다.”(인도인 저널리스트 A씨)

만모한 싱(Manmohan Singh·74) 인도 총리의 위상을 말해주는 얘기다. 얼마 전 뉴스전문 채널(NDTV)이 인도 국민을 상대로 차기 총리 후보감 조사를 했을 때, 싱 총리(32%)가 네루 집안의 소냐 간디 여사(31%)를 앞질렀다.

네루·간디 집안의 후광이 절대적인 인도에서, 그것도 집권연정을 이끄는 최고 권력자이자 여당 당수(黨首) 간디 여사를 ‘월급쟁이 총리’가 앞지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는 취임 3년 연속 8% 이상의 고속 경제성장을 일궈내면서, 인도 시장주의 경제의 설계자로 범국민적 신임을 받고 있다.

‘거대한 코끼리’ 인도를 잠에서 깨워 고속 성장 가도를 질주케 한 그의 리더십은 어디서 나올까. 이를 추적하다 보면 도리어 ‘도대체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부닥치게 된다. 그만큼 겉으로 드러난 조건이 초라하고 빈약하다.

그는 실세 아닌 ‘얼굴마담 총리’다. 2004년 총선에서 승리한 집권당(국민회의당) 당수는 소냐 간디(라지브 간디 전 총리의 부인)지만,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이어서 ‘외국인 출신이 총리를 맡아서야 되겠느냐’는 여론에 부닥쳤다. 그래서 1991년 경제위기 때 5년 간 재무장관을 지내면서 위기극복에 능력을 발휘한 싱을 대타(代打)로 내세운 것이다.

게다가 그가 이끄는 정권은 무려 19개 정당이 연합한 연립정부다. 연정엔 공산당과 좌파 정당도 참여하고 있다. 그의 개혁 정책을 도와주기는커녕 사사건건 발목을 붙잡는다.

그뿐 아니다. 그는 인도 역사상 최초의 비(非)힌두교도 총리다. 종교가 생활을 지배하는 인도에서 그는 국민 80%가 믿는 힌두교도가 아니라 겨우 2.4%만이 믿는 시크교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언론에는 종종 그의 사임설이 등장한다. 2005년 여름 폭우 피해가 심했을 때, 인도의 유력 신문 이코노믹 타임스는 “개혁조치에 끊임없이 딴죽 거는 연정 내 좌파와 자신에게 거의 도움을 주지 않는 집권연정에 격분한 싱 총리가 사임을 원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쯤 되면 ‘총리 못해먹겠다’는 얘기가 나올 법 한데도 그는 거꾸로 인도 최고의 총리로 불린다.

한국의 청와대에 해당하는 총리실의 업무 시간은 밤 10시가 넘는다. 싱 총리가 매일 밤 10시를 넘겨 일을 하기에 보좌진들도 저녁 약속을 하지 않고 사무실에 머문다.

그의 성실함은 11억 인도인에게 희망이 되고 있다. 그의 통치 기간 중 경제 성적표는 A+다. 첫해 8%, 둘째 해 8.4%, 셋째 해인 올해 상반기엔 경제성장률이 9%를 넘었다. 옥스퍼드대 경제학 박사인 그는 스리(Shri·인도식으로 존경하는 선생님이란 뜻)나 미스터(Mr.) 대신, 닥터(Dr·박사)란 호칭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이런 그를 두고 인도인들은 ‘프로페셔널(Professional) 리더십’이라고 부른다.

그가 취임하면서 내세운 모토는 ‘인간의 얼굴을 한 개혁’. 정치적인 수사(修辭)라는 냉소적인 평가가 많았지만 지금은 “인도에 두 마리 토끼(성장과 분배) 잡는 법을 알려 준 희망의 지도자”(인도상의·FICCI 아밋 미트라 사무국장)란 평가를 얻고 있다.

그는 참을성의 리더다. 인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 다양한 사회다. 공식공용어만 18개다. 셀 수 없는 민족과 종교는 영·호남 갈등, 세대 갈등으로 고민하는 우리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이것저것 따지면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그래도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결코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다. 말을 앞세우지도 않는다. 그와 막역한 한 인도 교수는 익명을 전제로 “아마 속이 100번은 더 타들어 갔을 것”이라며 “역사적 사명감으로 모든 걸 인내하는 것이며, 이를 인도인 많은 사람이 알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은 파키스탄 땅(펀잡의 가흐)이 된 곳이다. 그의 고향 친구인 라지윈더(66)는 “겨울에도 맨발로 학교를 다녔고, 전기가 없어 길거리 가로등 밑에서 공부하던 친구”라고 회상했다.

지독한 가난의 경험을 국가 발전의 에너지로 승화시켰다고 주변 사람들은 분석한다.

또한 그는 조화의 리더십의 소유자로 일컬어진다. 참는 데 그치지 않고 남들을 이해시켜 어울리게 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싱 총리는 회의를 주재하며 끊임없이 듣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자신의 생각이 뭔지 오히려 각료들이 궁금해할 정도다. 왜 그에게 ‘다양성의 조율사’란 평가가 따라다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인도 서민들에게 싱 총리에 대해 물어보면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2004년 연료 값이 마구 오를 때였다. 온 국민이 아우성이었지만 정부는 국가 재정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 확고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가격 인상 폭이 확 줄었다. 싱 총리의 부인이 거리의 민심을 전하자 그가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진실성을 넘어 인도 사회가 그에 대해 합리적인 얘기를 하면 들을 줄 아는 지도자란 믿음을 갖고 있다는 걸 상징하는 에피소드로 회자되고 있다.

그는 ‘프로페셔널 리더’란 확고한 믿음을 인도 국민과 해외 투자자로부터 동시에 받고 있다. 열악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인도가 가야 할 방향으로 정확하게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온 세계가 인도의 잠재력을 인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그런 리더가 있기 때문이다.

뉴델리=이인열특파원 yiyul@chosun.com

2007.01.02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