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대 동창회 소식지 함춘 회보 2011년 9, 10 월 호

법을 지키는 나쁜 의사?  법을 어기는 착한 의사?

최근 초기 위암에 대한 내시경 수술의 보험수가 문제로 언론이 시끄러웠고 결국 직격탄을 맞은 환자들이 거세게 항의하면서 의료계와 정부 양쪽이 약간씩 양보하는 선에서 해결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모순투성이인 우리나라 의료보험급여제도 때문에 나도 전에 여러 번 항의를 하기도 하였으나 매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기분만 들고 소용이 없었고 이런 일이 자주 있다 보니 이제는 무감각해졌고 은퇴할 날만 기다리면서 애써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가도 이런 뉴스를 접하면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게다가 최근에 경험한 어찌 보면 사소한 일이 생각나서 또 다시 분개하고 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인턴만 끝내고 미국으로 가서 십 여 년 동안 대학병원에서 환자를 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나라 대형 대학병원에 왜 그리 외래환자들이 많은지가 참으로 이상하게 보였다(미국 대학병원들은 입원 위주의 진료를 하며 외래환자 수는 매우 적다). 결국 그 이유가 터무니 없이 낮은 보험수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참으로 씁쓸하였고 이러한 왜곡된 외래진료시스템이 언젠가는 선진국 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싼 외래 진료수가 때문에, 그리고 의료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소한” 감기환자도 자주 내원하도록 하고 또 대학병원도 일반의원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외래환자진료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환자들은 5분 진료받으러 또는 검사결과 하나 들으려고 먼 길을 비싼  교통비와 시간을 낭비하면서 보호자와 함께 자주 병원에 와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로 인하여 야기되는 교통체증, 공해 발생, 자동차 기름 낭비 등도 이러한 비정상적인 진료행태로 인한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 내가 취한 방법은 간단한 검사 결과는 개별적으로 전화로 알려주었다. 물론 이럴 경우 진료비는 없으므로 병원에서 좋아할 리가 없으나 나는 그래도 소신껏 내 양심에 따라 이런 방법으로 환자들을 도와주었고 의무기록도 남겼다(EMR 도입 전이므로 가능하였다).

그러나 환자 수가 점차 많아지고 이런 식으로 환자들을 도와주는 일에 한계가 왔고 EMR 도입 후 의무기록을 남길 방도가 없어지고 또 의료사고의 위험도 있어서 이런 방식의 “무료봉사”를 그만두고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정식으로 외래진료예약을 하고 진료비를 납부하여야만 전화 상담이 가능하도록 예약제도를 바꾸었다. 그 결과 공식적으로 의무기록도 남길 수 있고 병원도 약간이나마 진료비 수입을 챙길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환자들은 진료비는 조금 내더라도 먼 길을 오지 않고도 검사결과에 대하여 상담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시간과 경비를 절감할 수 있게 되어 병원과 환자 양쪽 모두 만족해하는 이 제도를 한동안 문제없이 잘 활용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직접 보고 진료하지 않은 환자를 전화 상담만 하면서 진료비를 받는 것은 불법이라는 보험공단과 병원의 통보로 이제부터는 검사 결과만 확인하려 해도 환자가 직접 병원에 내원하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만 법대로 진료하는 좋은 의사이고 좋은 병원이고, 종전과 같이 전화로 상담 만하고 진찰료를 받는 것은 의료법을 위반하는 나쁜 의사이자 나쁜 병원이 된다고 한다. 환자 편의를 위하여 내가 한 일 때문에 나는 나쁜 의사가 되고 병원은 벌금으로 받은 진료비의 몇 배를 공단으로부터 환수조치 당하고 게다가 도덕적으로 불량병원이라는 낙인도 찍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류의 부당한 일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각 진료 분야별로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의사들은 알고 있다. 의료계와 정부 간의 불신 때문에 골병 드는 것은 결국 환자들이다. 오래 전에 고3 수험생들을 열 받게 하였던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라는 책이 있었지만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에서 환자를 진료하면서 이런 류의 황당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사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이 맞다 는 생각이 든다. 교과서대로, 또는 새로운 문헌을 참고하면서 환자들에게 최상의 치료를 하면서도 보험공단에서 마음대로 정한 보험급여기준과 일치하지 않아 결국 “과잉진료를 일삼는 나쁜 의사와 나쁜 병원”이 되는 일이 발생하면 참으로 화가 난다.

몰론 의료계도 자정활동을 통하여 신뢰를 쌓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국민으로부터, 또한 정부로부터 불신을 받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주장도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이와는 별도로 보험공단은 재정이 어려워서 보험급여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이해를 구해야 하며, 동시에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최상의 진료를 하고자 하는 양심적인 진료행위를 막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모든 의사들과 병원을 돈만 밝히는 범법자로 몰아가는 부당한 처사는 멈추어야 한다. 법을 지키는 나쁜 의사가 될지, 또는 법을 어기는 착한 의사가 될 지, 양자 택일을 강요당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무엇이 진정으로 환자와 국민을 위하는 길 인가를 정부는 깨닫기 바란다.

함춘회보 <함춘광장> 2011년 9.10월호